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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2년 2월 18일. 전주 예수병원에서 태어난 박난아 씨.

친어머니는 박 씨를 출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고, 딸 다섯을 홀로 키워야 했던 친아버지는 양육에 대한 부담이 크게 다가와 박 씨를 익산에 있는 기독 영아원으로 보냈습니다.

그렇게 영아원에서 지내던 박 씨는 6살이 되던 해에 한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돼 '제시카 브룬'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. 12살엔 양부모와 함께 스페인 테네리페로 이사하게 되는데 당시 다니던 학교에서 한국인 친구를 만납니다. 그 인연을 통해 박 씨는 어린 나이였지만 고향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됐다고 말합니다.

자신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을 갖기 시작하는 동시에 꿈도 꿉니다. 한국의 해양 조선산업이 유망하다는 정보를 접한 뒤 선박 관련 진로를 탐색하게 된 겁니다. 해양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'첫 여성 선박 검사관'으로 일한 박 씨. 2003년에 교통사고로 양부모를 잃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박 씨는 지난 2005년,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국에 들어와 해양 엔지니어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.

그때부터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가족 찾기를 시작했지만,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. 가진 거라곤 입양되던 당시 손에 쥐었던 입양기관 수용의뢰서 단 한 장. 그리고 자신의 한국 이름으로 여겼던 '홍금영'이라는 세 글자뿐이었습니다.

2005년, 서류에 쓰여 있는 출산 기록 등을 토대로 곳곳을 전전하다 친어머니가 자신을 낳아주셨던 전주 예수병원에서 숨진 기록을 발견하게 됩니다. 그 기록을 남긴 병원 직원을 찾기 위해 2년을 넘게 헤맸지만, 직원은 이미 이민을 한 뒤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. 그렇게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.. 10년이 넘도록 홀트아동복지회와 같은 갖은 기관의 도움을 받아봤지만,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.

박 씨가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건 전북지방경찰청이었습니다. 잠시 독일에 들어갔다가 올해 2월 입국한 박 씨는 경찰청 민원실을 찾아 가족 찾기를 신청했고,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사연을 세상에 알렸습니다. 이렇게라도 가족들과 연이 닿지 않을까, 돌아가신 어머니는 못 뵈었지만 살아생전 아버지께 인사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. 간절함은 커져갔습니다.

경찰은 박 씨로부터 받은 기록을 들고 병원 원무과, 주민센터 등을 돌며 친아버지와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. 급기야는 최면수사까지 진행하며 박 씨의 과거를 추적했습니다. 석 달쯤 지난 이달 초, 경찰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한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주민자치센터 직원이 찾아낸 낡은 제적부에서 친부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. 간절함이 비로소 하늘에 닿은 순간이었습니다.

안타깝게도 박 씨는 그토록 찾던 친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. 친부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입니다. 하지만 혈육들은 남아있었습니다. 세 언니와 고모가 박 씨의 곁으로 기적처럼 오게 된 겁니다.

이제 원래부터 본인의 것이었던 한국 이름도 알게 됐습니다. 바로 부모님이 지어주신 예쁜 이름 '박난아'. 이름을 듣자마자 스스로를 찾은 기분이었다며 행복해했습니다.


오늘(22일) 박 씨는 오전 10시에 꿈에 그리던 혈육과 처음으로 상봉했습니다. 고모와 고모부를 만나기 전부터 들뜬 표정으로 설레는 맘을 숨기지 않았던 박 씨는 경찰청사로 들어오는 고모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. 박 씨의 고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. '잘 컸다.', 한 마디로 조카의 손을 붙들고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.

그렇게 그간의 정을 잠시 나누고 카메라 앞에 선 박 씨. 고모를 보자마자 피가 끌리는 것처럼 진한 감동이 있었다고 말합니다. 또 전에 없던 확신에 찬 얼굴로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.

"제게도 가족이 있습니다."

앞으로 남은 가족들을 만나서는 친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, 자매들의 살아온 세월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합니다.

박 씨는 다음 달부터 다시 한국에서 근무합니다. 석 달 동안 거제도에 머물면서 가족들과 자주 만날 계획입니다. 가족을 찾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기대하는 마음이 꺼지고 주위에서도 포기하라는 말을 수차례 들었던 박 씨. 이제는 가족의 품에 안겨 행복한 나날을 보내길 바랍니다.